
[전쟁사]
[유럽항공전 3부] Act 3. 허수아비 로마군단 사자를 건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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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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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류상의 로마군단
1940년 9월 무솔리니가 그라찌아니를 몰아붙여 결국 그라찌아니가 공격을 결심하게 되면서 드디어 북아프리카 사막을 피와 모래폭풍으로 뒤덮게될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게 되었다. 사실 이 무렵 이탈리아군은 수적으로는 완전하게 영국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25만이라는 병력은 이집트 주둔 영국군의 3만병력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으며 전차의 보유대수도 영국군의 2배가 넘는 300대를 가지고 있었고 400문의 대포도 영국군의 150문에 비해서 큰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항공전력에서도 수치상으로는 48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이집트 주둔 영국공군에 비해서 4배나 많은 198기의 항공기를 파견한 상태였다. 누구나 이런 수치를 들이댄다면 이집트에 주둔중인 영국군의 운명은 이제 바람앞의 촛불신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류상에 기록된 숫자상이 우위에 불과했다.
실제로 무솔리니의 결정으로 전쟁에 뛰어들어 북아프리카로 오게된 이탈리아군은 황량한 사막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영불에 선전포고를 한지 3개월이 가까운 시간동안에 그들은 식민지 리비아에서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요란한 군사 퍼레이드만 여러차례 시행했을뿐이며 실전에 대비한 훈련은 거의 실시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들이 이런 황량한 사막에 오게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로마군단의 부활이라는 무솔리니의 거창한 기대와는 달리 거의 모든 이탈리아병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복무기간을 채워 이 열악한 지역을 떠나 고국에 돌아가서 피자와 스파게티를 실컷먹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뿐, 영국군을 꺽고 북아프리카를 제패하겠다는 전투의욕을 가진 장교나 병사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들이 보유한 장비의 질적인 면에서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우선 빠른 병력 수송에 필요한 트럭의 숫자가 태부족이어서 대부분의 병력은 사막 한복판을 걸어서 행군해야 했다. 반면 영국군은 3만의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운송수단이 충분했으므로 기동력이 매우 뛰어났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탈리아군이 보유한 장갑차량의 수준이 1910년대에 제작된 고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과 그들이 보유한 300여대의 전차들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었다. 가장 고물이었던 L3 전차는 단지 2정의 기관총만을 가지고 있어서 전차라고 부르기에도 창피할 정도였으며 37mm 전차포를 가지고 있던 M11 전차들도 장갑이 얇고 엔진출력이 모자랐던데다가 그나마 회전포탑도 없었다. 무솔리니가 그토록 자랑했던 최신형 M13 전차는 그나마 회전포탑에 47mm 전차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역시 장갑이 빈약했고 시속 15km 정도로밖에는 기동할 수 없는 굼벵이었다. 물론 현대전의 필수품과도 같은 대전차포나 대공포도 태부족이었다.
반면, 비록 영국본토가 독일공군의 맹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집트의 영국군은 병력과 장비의 수를 제외한 모든면에서 이탈리아군에 비해서 월등했다. 그들은 오랜 이집트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사막의 기후에 적응하도록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모든 병사들은 조국이 큰 위기에 빠진 마당에 이집트에서마저 이탈리아군 따위에게 패할 수 없다는 자부심과 전투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더구나 지중해 지역을 무적의 영국해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해군은 항공모함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전개될 이탈리아군의 진격로와 보급로는 영국해군의 함포사격과 항모 함재기의 공습에 노출되어 있는 약점이 있었다.
게다가 1940년 6월부터 무솔리니가 이집트의 영국군을 공격해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겠다며 공공연하게 떠들어댄 덕분에 영국군은 진작부터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탈리아군이 계속 공격을 지연하면서 3개월이나 시간을 끌어 버렸기 때문에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준비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영국의 스파이들과 정찰대는 수시로 리비아의 이탈리아군 진영을 감시하면서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이탈리아군에게는 애초에 전격적인 기습작전 같은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사막의 하늘
리비아에 파견된 이탈리아공군의 항공전력을 살펴 볼 때도 '수적인 우세, 질적인 열세'라는 근본적인 상황은 비슷했다. 그라찌아니의 휘하의 북아프리카 파견 이탈리아공군에는 114기의 전투기들과 84기의 폭격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중 폭격기들은 비교적 신형 사보이아마르께트 SM.79 폭격기들로 장비되어 있어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지만 이들을 호위할 114기의 전투기들은 주로 피아뜨 CR.42 복엽기들또는 더 구식인 CR.32 전투기들로서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이미 시대의 흐름에서는 한참 뒤떨어지고 있었다.

[ 전선 상공을 정찰하기 위해 출격준비중인 이탈리아공군 주력전투기 CR.42 ]
반면 영국공군은 48기의 전투기밖에는 없었지만 CR.42와 대등한 글로스터 글라디에이터 복엽전투기 40기에 더해서 CR.42를 완전히 능가하는 신예전투기 허리케인을 8기정도 운용하고 있었으므로 질적으로는 볼 때는 오히려 영국공군이 우위에 있었다. 독일의 맹공으로 본토의 상황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허리케인 전투기가 8기나 공급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영국이 북아프리카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주간과 야간에 발생하는 엄청난 기온변화와 시도때도 없이 발생하는 모래폭풍을 특징으로하는 황량한 사막의 기후에서 항공기를 날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유럽기후에 맞도록 제작된 이런 항공기들을 사막 기후에 적합하도록 개조하고 운용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데,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공기는 낮동안에 항공기 연료탱크속의 연료를 기화시켜 연료탱크가 기화된 연료로 가득차기 때문에 하나의 강력한 폭탄과도 같이 변해 버리게 되어 총탄을 맞는 경우는 물론이고 사소한 충격을 받기만해도 폭발을 일으키기 쉽게 된다. 게다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하늘을 뿌옇게 만들어 버리는 사막의 모래먼지는 조종사들의 시야를 방해하며 항공기 엔진을 쉽게 손상시키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없이 모래먼지에 노출된 항공기들은 사막에 도착하면 채 30시간도 비행하지 못하고 엔진이 치명적인 고장을 일으키기 십상이었다.

[ 영국 사막공군의 보물이었던 허리케인 전투기, 사막지역에서의 작전에 문제가 없도록 기수 아래쪽에 방진 필터를 부착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
영국공군은 오래전부터 사막지역에서 항공기를 운용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항공기들을 사막기후에 적응시키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우선 태양이 뜨거운 주간에는 반드시 그늘에 항공기를 주기시켜 연료폭발을 방지하도록 했으며 항공기 엔진에 치명적인 모래먼지를 흡입하지 않도록 하는 방진필터와 같은 필수장비를 모든 항공기들에게 장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막지역에서의 경험이 부족했던 이탈리아공군은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혹독한 사막의 기후는 비행기뿐아니라 조종사들에게도 괴로운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와 같은 광대한 사막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게되면 양측의 조종사들은 상황에 따라서 여름에는 모래먼지가 난무하고 겨울이되면 늪처럼 변해 버리는 사막지역에 임시로 가설된 천막이나 또는 빈연료통, 드럼통등으로 만들어진 초라한 야전 캠프에서 턱없이 모자라는 식수와 말라비틀어진 야전 식품을 먹으면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영국군의 조종사들은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적응훈련이 잘되어 있었지만, 고국에서 귀족 대우를 받으며 호이호식하던 이탈리아 조종사들은 한번도 이런 낙후된 환경에서 작전하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만일 공중전중에 피격되어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경우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게 되는데, 가까운 곳에 우군이 없거나 조종사 구조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곳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사막의 전투에서 단순한 수적우세는 아무런 이점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한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준비하며 사막에 적응하는 쪽이 항공전의 승자가 될 것이요, 그렇지 않은쪽은 비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사자를 건드린 로마병정
1940년 9월 13일, 드디어 공격개시 명령과 함께 이탈리아군의 전면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집트 국경을 향해 리비아의 카푸쪼 요새를 떠난 이탈리아군은 총 8만의 병력으로 보병 5개사단이 7개 전차대대를 앞세우고 300기의 공군기들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마치 고대 로마군단이 적진을 향해 쳐들어 가는 것처럼 전차부대, 보병, 자동차부대 순으로 위세당당하게 대열을 형성하고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이 모든 것은 영국군 정찰대에 의해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바짝 긴장하고 숨어서 동향을 파악하던 영국 정찰대는 몇 발의 포격이 끝난후 모래먼지가 걷히기 시작하자 시야에 나타난 이탈리아군의 진격상황을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건 말이 전면적인 공격이지 이탈리아군은 마치 퍼레이드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전에서 전면적인 공세에 필수적인 적진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 포격이나 폭격기에 의한 기습폭격 같은 것은 거의 없었으며 사막에서 필수적인 병력운송수단인 트럭이나 자동차가 부족해서 보병들은 대부분 줄을지어 사막을 걸어서 행군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자라는 트럭들중 상당수는 무솔리니의 명령에 의해 병력이 아니라 대리석덩어리들을 싣고 대열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대리석들은 이탈리아군이 승전하는 곳마다 무솔리니를 찬양하기 위해서 세워질 예정인 승전기념비였던 것이니, 이건 정말 어이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전격적으로 돌진해 들어가 적진을 유린한후 보병들을 기다리는 독일전차부대의 전격전술같은 것은 이탈리아군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탈리아의 전차부대는 이탈리아 보병들이 걷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그야말로 거북이처럼 기어서 이집트 영내로 천천히 굴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군은 이탈리아 공군기들이 초전에 대규모 출격으로 맹렬한 폭격을 하리라 예상하고 모든 병사들에게 이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지만, 이런 기대 (?)와 달리 이탈리아 공군의 움직임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영국공군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이집트 영내로 날아가 영국군의 진지에 대해서 폭격을 퍼붓는 것은 꿈도 꾸고 있지 않았다. 조종사들은 황량한 사막 한복판으로 비행하는 것을 꺼려했고 고작 전투기 2-3대가 이탈리아군 상공에 가끔씩 나타나서 영국군의 동향을 살피며 맴돌다가는 기지로 돌아가 버리곤 하는 것이 전부였다. 때마침 영국공군이 이탈리아전투기와의 교전을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이탈리아군의 상황을 정찰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공중전도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진격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자 상황은 더욱 한심해졌다. 병력을 싣고 달리던 트럭들은 엔진과열로 정지해 버리기 일쑤였으며 그때마다 트럭에 타고 있던 병력들은 모두 내린후 무거운 장비를 들고 걸어서 행군에 합류해야 했다. 단적인 예로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제 1 공수사단의 정예병력들은 말로만 공수사단이지 낙하산으로 적후방에 투입해 기습을 가한다는 공수부대가 일반 보병들과 똑같이 걸어서 행군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영국군이 매설한 지뢰밭속으로 제대로 들어가 버려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결국 창공의 용사 공수부대원들이 하늘이 아닌 땅에 바짝 붙어 이리저리 기어 다니면서 지뢰를 파내야하는 꼴볼견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탈리아에도 공수부대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에서만 비행기를 타보았다. ]
그러나 이중에서도 제일 압권이었던 것은 이탈리아군 선발대중 한 부대가 사막에서 완전히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던 장면이었다. 모래먼지속에서 방향을 잃고 당황한 장교들은 나침반과 지도를 들고 서로 이쪽이 맞다 저쪽이 맞다 싸우고 있었고 병사들은 이런 어이없는 상황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 부대의 움직임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을 감시하며 따라다니던 영국군 정찰대원들은 그들이 상대할 적수가 겨우 이런 정도라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한마디 했다.
"저녀석들 지금 도대체 뭐하고 있는거지? 이거 정말 따라다니느라 힘들어 죽겠군... 우리 영국군을 완전히 물로 보는 건지 아니면 정말 뭘 모르는 건지 헷갈릴 정도구만... "
* 먹이를 끌어들이는 영국의 사자들
이탈리아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카이로의 영국군 사령부에서는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이 지도를 보면서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일단 병력의 열세라는 약점을 직시하고 이탈리아군을 이집트 영내로 최대한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웨이벌은 전선의 영국군에게 쳐들어오는 이탈리아군과의 전면적인 대결은 피하고 최대한 피해를 입힌후에 신속하게 철수하여 병력을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국공군은 이탈리아공군과의 교전을 최대한 삼가면서 이탈리아군의 능력과 동향을 살피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지상의 영국군도 이탈리아군이 시야에 나타나면 먼거리에서 포격을 퍼부어준후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시작되기전에 차량이나 오토바이등을 타고 신속하게 철수하는 '치고 빠지기'작전을 구사하며 전력을 보존했다. 이렇게 되자 이탈리아군은 매복하고 기다리던 영국군이 퍼부은 포탄과 총탄세례를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기 일쑤였으며 그들이 전열을 정비한후 본격적으로 공격하려고 하면 어느새 도망쳐 버리는 영국군들 때문에 계속 큰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영국군의 기동력이 훨씬 좋아서 제대로 추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영국군이 약간의 교전만 벌인후 계속 신속하게 후퇴하고 있었으므로 이탈리아군은 개전후 4일째에 이집트 영내로 100km이상 진격할 수 있었고, 자신들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전쟁에 이기고 있다며 들떠 있었다. 드디어 이탈리아군은 그들이 영국군의 최일선 교두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시디바라니라는 해안 마을에 입성했다. 사실 이 해안마을은 교두보는 커녕 초라한 오두막들로 이루어진 촌락지역이었지만 이탈리아군은 그들이 아프리카의 맹주 영국군을 박살내 위대한 승리를 했다며 떠들어 댔고 로마방송은 신나는 행진곡과 함께 연일 찬란한 승전보를 떠들어대며 머지않아 이집트는 이탈리아군의 지배에 들어올 것이라며 국민들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양측의 손실을 살펴보면 이야기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4일간 120명의 전사자와 480명의 부상병들이 발생했으며 많은 차량들이 피격되거나 고장을 일으켜 전열에서 이탈했다. 반면 영국군의 손실은 40여명의 사상자에 불과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영국수상 처칠은 훗날 이집트의 전황이 불리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언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영국군이 이탈리아군 따위에게 밀렸을리가 있을까요? 단지 우리군의 대포가 포탄을 실컷 날려 이탈리아군을 무참하게 도륙한후에 전술상 약간 물러선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영국군은 계속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시디바라니에서 130km정도 떨어져 있었던 머사메트루에 모든 병력을 집결시킨후 굳건한 방어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만일 이탈리아군이 여기까지 온다면 영국군도 전력을 동원해 맞서려고 했기때문에 아무리 이탈리아군의 전력이 형편없었다고는 해도 병력의 차이로볼 때는 엄청난 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예상과 달리 이탈리아군은 돌연 엉뚱하게도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그라찌아니는 영국군이 계속 물러나는 것을 심상치 않게 여기고 영국의 반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고 시디 바라니에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는 이정도 영토를 차지했으면 그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군은 시디바라니를 기점으로 26km간격으로 총 7군데의 방어진을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방어진이 완성되자 병사들은 무장을 풀고 승전무드속에 샴페인과 양고기를 구워먹으며 축제분위기로 빠져들어갔다. 애초부터 공세에 소극적이었던 그라찌아니 원수는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으며 이 시디바라니를 굳건하게 방어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라찌아니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이런 상태는 무려 3개월 가까이 지속되었고, 계속 지리한 시간이 흐르면서 이탈리아군의 군기는 땅에 떨어져가고 있었다. 장교들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막사에는 온갖 사치품들이 공급되었으며 고급 카페트를 깔고 잠을 잤고 뜨거운 목욕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반면 병사들은 연일 계속되는 형편없는 식사에 불만을 터트렸고, 위생상태가 불량한 허름한 막사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러니 장교들에 대한 불평과 불신이 팽배해 있었으며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병사들은 언제가 되야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이런 황량한 사막에 보낸 무솔리니를 대놓고 욕하는 병사들도 많았다.

[ 북아프리카 전선의 주요 요충지를 보여주는 지도, 무솔리니는 영국군의 해군기지가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점령하라며 독려했지만 이탈리아군은 1/6도 안되는 100여km 정도의 거리만 진격해 들어가 시디 바라니에 둥지를 틀고 안주하게 된다. 여기서 130km 정도 떨어진 머사 메트루에서는 영국군이 반격을 위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훗날 격전이 벌어지게될 토브룩, 엘알라메인 등의 지역에도 주목! ]
한편, 영국은 그라찌아니의 고마운 (?) 결정덕분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공격이 시작된 1940년 9월 13일부터 시디바라니까지 진격했던 4일의 시간동안에 유럽전선에서의 전세에 큰 변화가 있었다. 사실 9월 13일은 독일공군의 영국본토 폭격이 최절정에 달해 있는 무렵이었다. 영국의 수도 런던마저 무자비한 폭격에 노출되어 연일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무솔리니는 독일공군이 영국공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무적의 독일육군이 영국본토에 상륙하여 영국을 점령해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독일군에게 본토를 점령당한 영국군은 지리멸렬하여 이집트에서도 이탈리아군에게 항복할 테니 이탈리아군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 처럼 손쉽게 이집트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세는 무솔리니의 생각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시작된지 이틀후인 9월 15일에 영국의 하늘에서는 영국본토 항공전의 전세를 결정하게 되는 최대규모의 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날이 바로 '영국본토 항공전의 날 (Battle of Britain Day)'이었다. 그러나 영국공군은 이날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독일공군의 맹공에 굳건하게 맞섰으며 하루종일 계속된 격전끝에 결국 독일공군을 패퇴시켜 개전이후 가장 큰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영국본토 항공전 - 영국본토 항공전의 날 참조)
결국 히틀러는 이날을 기점으로 독일의 영국본토 침공작전을 사실상 포기하게되며 영국본토 상륙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히틀러는 방향을 돌려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소련침공이라는 원대한 꿈을 구체화 시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날 이후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공군의 영국본토 폭격은 점점 그 강도가 약해져 갔다. 이제 영국은 분명 벼랑끝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온 국민이 하나되어 재건에 나설 것이고 점점 군사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토로부터 지원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집트의 영국군도 시간이 흐르기만하면 반격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많이 수령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욱이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이탈리아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한후 틀어밖혀 머무르는 결정까지 내려주었으니 정말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결국 로마군단의 흉내를 내며 이집트로 진격해 들어간 이탈리아군은 목에 밧줄이 걸린 굶주린 사자의 꼬리를 밟고 서서는 사자를 잡았다고 좋아하는 풋내기 사냥꾼과 다를바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 사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밧줄이 점점 풀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채....
출처-불타는하늘(http://airwar.hihome.com)